빛, 생명, 근원 : 궁극의 구원, 궁극의 목적

 

 

 

Receptacle of Luminosity 전시평론

 

전유정 큐레이터

 

 

 

 1. 구도(求道)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마치 인류의 DNA에 적혀진 사명처럼 시대를 거듭하며 반복되고 있다.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손과 발을 입으로 확인하는 간난 아이 역시 존재에 대한 확인을 열망한다. 물론 아직 이 질문에 완벽한 대답을 한 이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그에 한 번도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연구하고 근원을 따라 종교를 맹신하지 않은가. 따라서 누군가 이 깨달음을 향한 열망을 가졌다면 그 해소 과정은 매우 험난한 수행과도 같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해야만 한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밝히는 순간들. 그러나 이 숙명과도 같은 존재에 대한 갈망은 기꺼이 그 수행의 길을 걷도록 한다.

 여기 이와 같은 물음을 반복하는 이가 있다. 작가 장용선은 생명체가 가지는 속성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예술로써 풀어내고 있다. 종교에 매료된 이가 절대자를 찾아 나서며 그들의 성전과 성서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는 금속에 의지하여 생명체의 절대적인 속성과 빛이 태동하는 순간들을 담아낸다. 일정한 간격으로 자른 강인 스테인리스 스틸 파이프를 연결한 금속 작업들은 태동과 탄생의 순간 등을 역동적으로 담아내며 때론 빛과 생명을 담는 둥지로서 연출된다. 윤슬, 빛, 생명, 탄생. 그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들은 모두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그 시작은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있어 고된 수행이란 그 자체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나아가 그 ‘실체’가 결코 녹슬지 않도록 반복하듯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채택하고는, 일정한 간격으로 절단하여 가공하고 또 가공한다. 그의 작업은 보통 4-6cm의 아주 작은 파이프의 단면들이 모여 군상을 이루는데, 이 파이프의 단면은 매우 작아 마치 입자와도 같다. 작가는 이런 이유에서인지 작품 시리즈를 미립자를 의미하는 <Particle>로 짓기도 했다. 생명체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세포와도 같은 이 파이프 단면들은 LPG 산소 토치로 가열하여 스테인리스가 내는 가장 고유의 색인 오로라 빛을 띠고 있다. 인위적인 안료에 의한 선명한 색이 아닌, 매끄러운 표면에 닿는 빛의 고유한 색상을 띈 각각의 ‘입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세포들이 움직이듯 생동감을 머금고 있다. 때문에 빛이 없는 공간이나 사진으로는 정확한 작업의 순간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해가 지는 석양 아래 혹은 강렬한 조명 아래 꿈틀거리는 빛의 순간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작은 입자들이 모여 폭발 에너지를 뿜어내듯, 작품이 빛과 만나는 그 때 영원히 스스로 숨 쉬지 않을 차가운 금속에 따뜻한 생명이 깃드는 상상에 빠진다.

 

2. 생명(生命)

 작가는 우주를 구성하는 총 물질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암흑물질(dark matter, 暗黑物質)을 작품 제목에 이용했다. ‘dark matter'란, 그 어떤 전자기파로도 관측되지 않으며 오로지 중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을 의미한다. 즉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 물질은 단지 존재함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물질의 이름과 산과 섬 등의 고유의 이름을 붙여 새롭게 준비한 시리즈를 공개했다.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암흑물질과 인간의 터전이자 생명의 공간인 섬과 산들이 나란히 이름을 함께 했을 때, 기존의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존재함은 과연 ‘보는 것’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작은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이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존재의 근원을 쫓는 탐구가 늘 그래왔듯이,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지식의 저 아래에 존재하는 것 역시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바로 중력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암흑물질처럼 말이다. 이처럼 작가는 우리가 굳건히 서있는 지식이라는 섬과 산에 생명의 에너지를 대표하는 암흑물질을 덧붙여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합으로 우리의 존재에 대해 다시 반문한다. 가령 무게로서 존재를 확인하던 금속이 볼 수 없는 어떤 진리와 함께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복잡한 가정은 아니다. 모두가 저마다 이상향을 품고 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묵직한 파이프의 군상이 그 순간과 빛과 함께했을 때,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그 자리에 대해 다시금 사유하게 된다. 인간은 작가가 산과 섬으로 표현한 물질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사명과 진리와 같은 빛에 기대어 살고 있다. 가시적 비가시성(visible invisibility),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일종의 궁극이며 구원이다.

 그런 이유에선지 이번 전시의 신작들은 조금 더 낮은 자세로 관찰하고 싶어진다. 인류는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대지의 단면을 관찰하거나 아주 먼 곳에서 그 굴곡을 한눈에 확인하듯 바닥에 붙어 관찰하고 작가가 준비한 작품의 하부를 비추는 물을 이용하여 멀찍이 관조한다. 그 낮은 자세에서 관객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는 절대 진리처럼 미쳐 헤아려 보지 못했지만 굴곡진 대지의 표면은 높낮이의 차이로 섬이 되고 산이 됨을. 낮은 것은 물에 잠겨 사라지고 높은 것은 섬이나 대지위의 산처럼 우뚝 솟아 특별할 것 없었을 땅과 시간을 새롭게 만든다. 각자의 한켠을 내주어 서로 기대고 있는 파이프의 단면이 하나 둘 증식한 작품의 형상은 분명 강한 물질성을 보여주고 있다. 허나 그것이 단순히 묵직한 파이프 덩어리가 아닌 시공간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인지되는 순간,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선 자리 그 곳의 공기와 빛, 떠드는 소리마저 작가가 찾아 헤맨 존재의 근원에 대한 답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전시의 제목인《Receptacle of Luminosity》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전시 제목을 직역하면 ‘광명을 담는 그릇’ 정도가 되겠다. 어쩐지 어렵게 느껴지는 단어의 나열이 생명을 껴안은 그 자체로 인식되는 순간, 명확한 의미의 파악과 언어의 이해를 앞선 직관적인 공감을 얻게 된다. 우리네의 삶에 아주 가까이 있으나 도저히 손에 잡아 보여줄 수 없고 뚜렷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와 빛을 그대로 담아 보여주는 장용선 작가의 기지는 숨구멍을 드러낸 생명체와 같이 연출한 작업의 형체와 그 공간을 둘러싼 빛의 조화에 있다. 즉, 기존의 물질성에 국한되어 있던 증명의 전제를 뒤엎고 그 순간을 관조하는 것만이 작가가 내던진 질문에 다가가는 새로운 통로가 될 것이다.

 

3. 여정(旅程)

 다시 이 금속으로 재현해낸 빛의 덩어리를 감상해보자. 이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덩어리는 생명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생명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파이프의 동그란 곡선을 따라 요동치는 빛의 산란은 작가가 여행으로부터 매료된 윤슬처럼 찰나의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선물하는 미메시스(mimēsis)이다. 뿐만 아니라, 이 얼기설기 유기적으로 연결된 작품은 그 곡선이 만드는 산과 섬의 모양, 둥근 둥지의 모양 등을 전체적으로 확인한 후 작품의 그림자를 맞이하는 순간 더욱 특별히 다가온다. 그림자로 재생산되는 작품의 새로운 이미지는 파이프를 지나간 빛이 만들어낸 흔적이기에 마치 거미줄처럼 연출된다. 금속이 낼 수 있는 가장 고유의 색이자 아름다운 색인 오로라 빛이 없는 그림자는 보다 더 단조로운 느낌을 자아내지만 얼기설기 얽혀있어 분명 거미줄과 닮았다. 게다가 이 거미줄과의 조우는 파이프 사이사이에 희미하게나마 거미가 자리를 친 흔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거미줄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통에 금세 자취를 감췄지만, 작가는 이와 같은 일이 종종 있는 일이라 한다.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종의 생명들이 머물고 간 작품과 그 그림자의 공통점은 생명의 흔적이다. 파이프 사이에 쳐있던 작은 거미줄,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낸 거미줄과도 같은 그림자의 연출이 실제와 상상의 차이를 두고 이토록 닮은 것은 우연일까. 죽음의 공간이 생의 터전으로 바뀌는 역설. 양면성이 존재하는 거미줄 위 삶의 모습은 결국 우리네 삶의 모습이 아니던가.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관찰한 일이 있다. 여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미는 마치 무중력의 상태로 우주를 떠도는 것 같이 비쳐진다. 끝없이 자신의 터전을 지어나가고 죽음으로부터 생을 얻는 거미의 삶이 흡사 작가 장용선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하는 생의 모습과 닮았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 역시 작가는 나름의 해석과 과정을 공개할 뿐 뚜렷한 답을 주지 않는다. 때로 그 답이 탄생의 순간을 묘사한 <particle>시리즈나 <dark matter>시리즈처럼 세상에 나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죽음을 그대로 전시한 <Treasure>시리즈처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결국 뚜렷한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껴안은 이 물질과 빛 위에 뿌리내린 생명을 찾아가는 과정만이 생명의 본질에 나아가는 더욱 완벽한 ‘정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