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좌표에서 의미를 찾다

 

 

이 관 훈 |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대표/큐레이터

 

 

최근의 현대미술 경향은 점점 다양화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도 형식이나 내용에서 예전과 다름없는 재생과 반복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작가들이 그 안에서 콘텐츠를 어떻게 편집해나가느냐에 따라 변별성 있게 나타난다고 본다. 장용선 작가도 자신의 창작언어를 찾아나가는 여정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의 물음과 함께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좌표(벤다이어그램)를 그려가며 확인해가고 있다.

물음(이상)과 좌표(현실), 이 간극은 4년 전 작가로 하여금 내면으로부터 깊이 사색하고 몰입했던 것에서 벗어나 세상의 안과 밖을 교감하며 폭넓게 확장하는 사유의 방법을 선택하게 했다. 그 결과물은 <On the road-천연기념물>(대안공간 눈, 2017), <Treasure N37°32’33.504"E126° 56.6604">(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시장, 2017), <결정체>(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시장, 2018), <불안한 리드>(스페이스 9, 2018), <보잘 것 없는 생명의 서사-천연기념물>(DMZ, 2018), <Where is your querencia?>(청주창작스튜디오 전시장, 2019) 등의 전시로 보여 졌다.

장용선은 간접적인 사회경험을 통해 결핍된 시대 현상을 목격하고 모순 가득한 정서적 풍경 안에서 침묵의 언어를 찾아낸다. 침묵은 어딘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이를 향해 블랙홀처럼 빠져드는 사색의 바다이다. 그는 마치 그 바다를 항해하며 현실에서 결핍되거나 유린당한 파편들을 발견하고, 묵시적인 형태의 빛으로 발화시켜 흑암(黑暗) 속에서 시를 쓰듯이 표현한다. 그리하여 사회를 통해 결핍되고 억압된 의식을 치유하고 무의식의 욕망을 해소하는 예술의 역할을 질문한다. 작가는 개별적 존재자로서 삶의 모순 속 역설적 아름다움을 감지하며 암호와도 같은 묵시적 언어로 그만의 신호를 세상과 교류하길 원한다.

또 하나의 관점으로 작가는 거시적인 것이 아닌 미시적인 것에서 세상의 미학적 가치를 찾는다. 일상에서 쉽게 간과했던 시선, 즉 길가, 골목길, 들판 등에 버려진 하찮은 것들을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발견하여 생물과 무생물을 채집하듯 원하는 시점과 장소에 옮겨 놓는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찰나적 사건을 부여하거나, 어떤 공간과 주체를 대립시킨다거나, 내부와 외부의 공간 구조를 형성한다거나, 혹은 개인과 사회와의 심리적 갈등을 사물에 은유하는 방식으로 유도한다.

 

최근 몇 년에 걸쳐 변화된 작품들은 새롭게 인식된 사고의 전환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행보는 기존 체제의 학습에 의해 가려진 감각의 본능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장용선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언제, 어디서’든 혼자서, 쉽게, 행할 수 있다는 상상으로서의 내러티브적 요소를 만들기 위한 접점에 있다. 그 경계에서 그는 물질과 조형의 집착보다는 보이지 않는 현상을 주시하면서 ‘빛과 공간과 사물’의 관계를 사유하고 고민한다.

스스로 설정한 물음과 좌표의 관계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환경에 둘러싸여 발현되는 창작의 의심은 실타래를 풀었다 감았다하는 것처럼 풀 수 없는 과정의 연속성이었지만, 오랜 시간의 사유체계와 이를 실험하고 검증하는 전시를 통해 갈등요소였던 나와 타자간의 사회적 구조, 시간과 대상들의 움직이는 변화,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와 질서, 공간의 와해와 정지된 시점의 파괴 등을 해결해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물음과 좌표는 작가에게 한 이미지로서의 완결성보다는 경우의 수에 따라 관계 항이 달라지는 변수를 경험케 하고, 결과적으로 시점이 다양해진다거나 점점 소실점이 추상적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얇고 유연한 인식의 변화로 인해 창작의 근원인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자인하는 태도를 갖거나 다른 잔영의 전이를 꿈꾸게 하는 상황까지 만들어 놓았다. 작업실에 놓여진, 또 다른 변화를 암시하는 몇 개의 모호한 오브제와 끄적거린 드로잉을 통해 작가의 욕망이 현재와 다른 미래를 생성시키려는 분열적 욕망에 부딪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 그 현상으로 인해 사유와 경험의 지경이 확장되어 해체된 언어들에 대한 자기비판과 자의식의 되돌이표가 과한 욕망을 진정시키는 처방이 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움 안에서 또 다른 예술적 아우라를 갖는 의미와 같다.